공연 / / 2025. 12. 3. 21:38

서리풀 오후의 실내악 <러시아의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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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3일

서리풀 오후의 실내악 – 러시아의 향수

아렌스키와 쇼스타코비치, 두 작곡가의 깊고 진한 울림 속으로

12월의 공기는 유난히도 차갑고 투명했습니다. 낮은 겨울 해가 서리풀 일대를 감싸면서, 공연장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더 가벼워졌습니다.

‘서리풀 오후의 실내악 – 러시아의 향수’는 올해의 겨울을 한층 더 깊게 만들어준 공연이었습니다. 러시아 음악 특유의 내면적 서정성과 감정의 밀도가 짙게 담긴 프로그램이었기에, 이번 오후는 음악 속으로 푹 잠겨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무대에 올라온 앙상블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로 구성된 삼중주 편성이었습니다. 비올라가 없는 편성은 오히려 소리의 실루엣을 선명하고 가늘게 다듬어 러시아 작품의 서늘함과 정서적 긴장감을 더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이날 연주는 작품의 감정을 날 것에 가까운 상태로 느끼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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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GRAM

1)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 Op.32

2)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 피아노 삼중주 2번 e단조, Op. 67

이날의 프로그램은 러시아 실내악의 진면목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는 선곡이었습니다.
아렌스키의 트리오 1번은 차이콥스키 전통을 잇는 서정성과 우울한 색채가 동시에 존재하는 작품이고, 쇼스타코비치의 트리오는 전쟁과 죽음을 경험한 한 인간의 질문과 절규가 담긴 장대한 음악입니다.

서정과 비극, 따뜻함과 냉엄함.
두 작품은 서로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러시아 음악만의 내면적 고백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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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

● 바이올린

맑은 톤으로 선율의 첫 줄기를 잡아내는 스타일이 돋보였습니다. 러시아 작품 특유의 애잔함을 과하게 꾸미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풀어내어 곡의 정서를 차분히 전달했습니다. 특히 아렌스키의 느린 악장에서 들려준 ‘아주 길고 부드러운 레가토’는 곡의 감정선을 잡아주는 핵심이었습니다.

● 첼로

깊은 울림과 묵직한 공명을 바탕으로 음악의 기반을 안정적으로 잡아주었습니다. 쇼스타코비치 트리오의 첫 악장에서 등장하는 하모닉스는 그 어떤 악기보다 공연장의 공기를 먼저 장악하는 순간이었고, 3악장의 애가는 절제된 슬픔으로 관객의 마음을 서서히 조여왔습니다.

● 피아노

전체 프로그램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했습니다. 아렌스키에서는 따뜻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냈고, 쇼스타코비치에서는 폭발적인 에너지와 극적인 대비를 명확히 드러내며 작품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특히 Op.67 4악장에서 보여준 단단한 리듬감과 반복적 모티브의 쌓임은 압도적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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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렌스키 – 피아노 트리오 1번 d단조, Op.32

“애수와 서정,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그림자가 드리운 음악”

아렌스키(1861–1906)는 러시아 낭만주의 음악에서 종종 차이콥스키의 제자라는 수식어로 소개되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히 차이콥스키의 아류가 아닙니다. 유려한 선율미, 진한 애수, 향수 어린 정서가 그의 음악 깊숙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피아노 트리오 1번 Op.32는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실내악 레퍼토리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 1악장 Moderato

바이올린의 서늘한 선율이 피아노의 잔잔한 반주 위로 떠오르면서 시작됩니다. 그 선율은 마치 먼 기억을 더듬듯 조심스럽게 흐르며, 곧 첼로가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이날 연주에서는 세 악기가 각자의 색을 명확히 지니면서도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모습이 돋보였습니다. 특히 첼로의 저음이 곡의 구조를 단단히 지탱해 주어 감정이 쉽게 흩어지지 않도록 잡아주었습니다.

■ 2악장 Scherzo

경쾌하면서도 어딘가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 악장입니다. 빠른 피아노의 반복 리듬 위로 바이올린과 첼로가 날카롭고 민첩하게 움직이며 긴장감을 부여합니다.
연주자들은 스케르초 특유의 날 선 표현을 과장하지 않고 정확한 아티큘레이션으로 전달해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주었습니다.

■ 3악장 Elegia

아렌스키 음악의 백미는 바로 이 Elegia에 있습니다.
부드럽게 흐르는 첼로의 선율이 곧바로 마음을 끌어당기고, 바이올린이 그 위에 얹히며 비애의 깊이를 더합니다. 피아노는 감정의 결을 부드럽게 빛으로 비추듯 받쳐주었고, 이날 연주는 이 악장의 슬픔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했기에 더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 4악장 Finale

뜨겁고 역동적인 흐름 속에서 1악장의 주제가 다시 등장하며 작품 전체가 하나의 서사로 묶입니다. 이날 연주는 마지막까지 에너지를 놓지 않고 힘 있게 곡을 마무리하여, 아렌스키의 낭만적 세계를 아름답게 완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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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스타코비치 – 피아노 삼중주 2번 e단조, Op.67

“전쟁 속 인간의 진실, 절망 속에서 던지는 질문”

쇼스타코비치의 Op.67은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전쟁으로 친구를 잃은 쇼스타코비치가 애도를 담아 쓴 음악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추모곡이 아닙니다.
전쟁 속 인간의 고통, 사회를 향한 비판,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까지 모두 얽혀 있으며, 그 감정의 규모와 깊이는 실내악임에도 교향곡 못지않은 무게를 지닙니다.

■ 1악장 – Andante

첼로의 하모닉스로 시작하는 유명한 도입부는 마치 얼음 위를 걷는 듯한 공기감을 만들어냅니다. 이날 공연에서도 이 첫 음이 등장하는 순간, 객석은 단번에 조용해졌습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천천히 감정을 더해가며 삼중주의 긴장감이 조금씩 쌓였습니다. 이 악장은 ‘고요한 절망’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맞을 만큼 섬세하게 진행되었습니다.

■ 2악장 – Allegro con brio

폭발적이면서도 기괴한 에너지가 담긴 악장입니다.
피아노는 날카롭고 민첩하게 움직였고, 바이올린과 첼로는 리듬을 정확히 끌어올리며 쇼스타코비치의 ‘불편할 만큼 빠른 에너지’를 그대로 구현했습니다. 이 악장은 연주자의 테크닉과 팀워크가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었고, 이날의 앙상블은 완성도 높은 합을 보여주었습니다.

■ 3악장 – Largo

애가(Elegy) 형식의 3악장은 전쟁의 고통을 직시하는 듯한 무거움과 체념이 담긴 음악입니다. 피아노의 절제된 코드, 첼로의 깊은 울림, 그리고 바이올린의 외로운 선율이 하나의 커다란 울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이날 연주는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지 않고 고요하게 표현해 오히려 큰 울림을 남겼습니다.

■ 4악장 – Allegretto

유대인 민속 선율을 차용한 마지막 악장은 비극적이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지닌 악장입니다. 반복되는 피아노의 리듬과 현악기의 날카로운 선율은 전쟁 속에서 사라져 간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들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울린 단단한 코드가 멈추는 순간, 객석 전체가 잠시 움직이지 못할 만큼 깊은 여운이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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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이 남긴 것

이날 공연은 러시아 음악의 여러 얼굴을 모두 품고 있었습니다.
아렌스키가 보여준 부드러운 서정, 따뜻한 감정의 흐름, 우아한 추억의 기운.
그리고 쇼스타코비치가 전한 전쟁의 어둠, 냉혹한 진실, 희망과 절망의 마지막 결투.

두 작품은 서로 멀리 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낸 음악이라는 점입니다.
이날 연주자들은 그 진심을 최대한 절제된 방식으로, 그러나 진심을 가득 담아 표현했습니다.

공연장을 나서는 길.
겨울 저녁의 공기가 차갑게 손을 파고들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따뜻해져 있었습니다. 좋은 공연을 만나는 날은 늘 그렇습니다. 음악이 우리 마음의 어떤 결을 건드리고, 오래된 기억을 흔들고, 새로운 이야기 하나를 남겨둡니다.

덧.. 좋은 공연이었습니다만 연말을 맞아 조금 더 밝은 주제의 실내악을 들었으면 더욱 좋았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공연 후 만족도 조사를 종이에 적게 되어 있는데 핸드폰으로 만족도 조사 폼을 전송해서 작성하는 방법으로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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