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동생으로 살아간다는 것 – 히가시노 게이고 『편지』를 읽고
요즘처럼 하루하루가 바쁘게 흘러가고, 뉴스에서는 어김없이 사건 사고가 쏟아져 나오는 시대에 살다 보면, 그 이면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까지는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해자, 피해자, 사회적 이슈들에만 집중하다 보면 정작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는 그런 면에서 저에게 꽤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이 소설은 평범한 우리의 삶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면서도, 우리가 쉽게 외면해온 진실을 담담하게 끌어내 보여줍니다. 읽고 난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고, 마음 한켠을 자꾸만 건드리는 작품이었습니다.
“형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소설은 아주 단순한 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형이 사람을 죽였다." 한순간에 동생 ‘나오키’의 인생은 송두리째 흔들립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사람’이 아닌, 살인자의 동생으로 낙인찍히게 되죠. 우리는 흔히 사건의 가해자나 피해자에 집중하지만, 『편지』는 그 뒤에 남겨진 사람—가해자의 가족이 겪는 삶을 아주 섬세하고도 현실감 있게 그려냅니다.
나오키는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형과 단둘이 살아가며 힘든 삶을 견뎌냅니다. 그런 형이 동생의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저지른 범죄로 인해 수감되며, 나오키는 그 뒤로 끊임없는 사회적 낙인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는 항상 어딘가로부터 도망치듯 살아야 했고, 일자리를 얻는 것도, 누군가와 진실된 관계를 맺는 것도 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형의 ‘편지’, 그 무게
이 소설의 제목이 『편지』인 이유는, 나오키가 형에게서 정기적으로 편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편지는 반가운 소식이나 따뜻한 감정이 담긴 것일 테지만, 나오키에게 이 편지는 한없이 무거운 족쇄 같은 존재로 다가옵니다. 형은 나름대로 동생에게 사랑을 표현하고 싶어 하지만, 그 마음조차 나오키에게는 점점 더 고통으로 다가오죠.
형이 보낸 편지를 찢어버리거나, 읽지도 않고 버리는 장면에서는 개인적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편지지만, 나오키에게는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그리고 끊임없이 '살인자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도구였던 거죠. 형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유대감.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오키의 감정이 너무나 인간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차별이라는 이름의 폭력
나오키가 살아가는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잔인했습니다. 직장을 어렵게 구해도, 어느 순간 그의 ‘과거’가 드러나면 바로 해고당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도, 그 가족이 나오키의 형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관계는 깨어집니다. 단 한 번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과 피를 나눈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나오키는 계속해서 처벌을 받습니다.
이 장면들을 읽으면서 문득 저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과연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을 때, 과연 선뜻 손 내밀 수 있었을까. 나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판단하고 거리를 두지 않았을까. 나오키는 말합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는 벌을 받아야 하죠?" 그 말이 너무 아프게 박혔습니다.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가해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단죄하고, 배제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었습니다.
진심은 닿을 수 있을까
『편지』는 단지 슬프고 불쌍한 이야기만을 늘어놓지는 않습니다. 그 안에는 작지만 진심 어린 변화도 담겨 있습니다. 나오키를 이해하려는 몇몇 사람들의 존재는 이 이야기의 숨 쉴 틈이자, 희망의 불씨였습니다.
특히 나오키가 밴드활동을 통해 마음을 열고, 자신의 진짜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는 과정은 인상 깊었습니다. 음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으려는 그의 몸부림이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형의 마지막 편지. 그 편지를 읽고 형이 진심으로 동생의 행복을 바라며 ‘끊는 선택’을 하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났습니다. 누구보다 나오키를 아끼면서도, 그 사랑이 짐이 된다는 걸 알게 된 형의 결단은, 어쩌면 형이 동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읽고 난 후, 마음이 잠잠해지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책을 덮은 후, 한동안 생각이 많았습니다. 이건 단순한 범죄소설도 아니고, 그렇다고 희망만을 이야기하는 감동소설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라서 더 아프고,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보통 ‘선과 악’, ‘피해자와 가해자’를 단정적으로 나누고 세상을 바라보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편지』는 그 경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주변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의 고리를 누가, 어디서, 어떻게 끊거나 이어가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결국, 인간의 이야기
히가시노 게이고는 『편지』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용서란 무엇인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들은 거창하지 않지만,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아야 할 삶의 본질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조금 더 섬세하게 주변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뉴스 속의 가해자, 혹은 그 가족들, 혹은 조용히 살아가는 누군가가 겪고 있을지 모를 고통을 우리가 너무 쉽게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결국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드는 것은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무리하며
『편지』는 읽는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동시에 깊은 감동을 안겨주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느낀 점은, 결국 누구나 타인이 되어 상처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타인의 상처를 외면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식하고 한 발 더 다가가려는 노력, 그게 우리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중 가장 묵직한 여운을 남긴 작품. 『편지』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가볍게 읽을 수는 없지만, 한 번쯤 꼭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작품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도 이 책을 조심스럽게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한 장의 인생이라 여겨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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